2008.10.11~12 / 흑포사건
충무로에는 내가 자주 가는 현상소가 하나 있다. 이름하여 '흑포 현상소'.
이름이 왜 그런지는 묻지 말길 바란다. 쥔장 맘이 아닌가...
원래는 '흑백포토랜드' 라고 알고 있는데, 그걸 줄이고 뒤에 '현상소'라는 노골적인 용도설명을 붙인 결과로 생각한다.
그곳을 단골 삼은 이유는 아마도 단 하나였지 싶다..
거의 연중 무휴라는 점.
평일 9시까지 영업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요일까지 영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너무도 매력적인' 바로 그 것이었다..
이번 목요일 저녁에도 여지없이 소진이 끝난 T-Max 400 한롤을 현상소에 맡기고 돌아왔다.
그리곤 금요일은 회사에 일이 있는 관계로 현상소에 미쳐 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 밀린 토요일 저녁.
이사님의 차를 빌려타고 도착한 흑포에서, 신입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은 필름찾으러 온 버드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곤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급한 듯 들어온 흑포 쥔아저씨. 나를 현상실로 이끌어 조심스레 꺼낸 말은..
필름이 어디로 갔는지 또는 어떻게 됬는지 모르겠다라는 이야기였다..
필름이 벌크라서 현상탱크 어딘가에 걸려 빠져나오지 않은 것 같다라는 둥, 벌크같은 경우는 약하게 감아서 필름 끝단이 걸려서 현상탱크에서 못빠져나오는 경우가 있다는 둥.. 필름분실에 대한 사유가 아닌 필름분실에 대한 변명조차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한다는 느낌을, 지금에 와서 조차 지울 수 없다...
버드는 머리가 텅텅 비어버린 채 집으로는 너덜너덜 돌아왔다. 흑포에는 연락을 부탁한다는 명함 한장 쥐어주고는 대신 쥔장이 건네준 델타100 벌크 3롤 어설피 손에 들고 말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내가 어떤 피드백을 해야만 제대로 된 것인가...
정신이 차마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민도 분노도 스물스물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도 만 하루가 지나야만 했다..
다음 날 오전, 느닷없이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혀 알수없는 수신자번호가 하나 떴고 난 통화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혹시..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흑포의 쥔장 아저씨의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필름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필름이 일반 필름보다 길어서 건조대에서 떨어진 줄 몰랐다는, 마치 그 잘못이 벌크필름을 맡긴 이에게 있다는 듯한 기분나쁜 변명따위는 당시에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나중에야 곱씹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을 뿐이다)
그저 찾아서 고맙다는 기분뿐이었다고 당시를 전언할 수 있을 것이다.
점심 무렵, 흑포에 도착했을 때 쥔장 아저씨는 없었다. 다만 전술했던 그 알바생만이 있었고 도착한 나에게 현상된 필름 한롤을 내밀면서 단지 '한 장'만이 파손되었을 뿐 나머지는 멀쩡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나는 왜 그 알바생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잘못도 없을 뿐더러 찾았으니 응당 고마워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고 표현하는 듯한 제스츄어를, 그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던 것일까?
봉투에서 꺼내든 현상필름은 척 보기만 해도 4장 가량이 구겨져 파훼되어 있었지만 자세한 현황은 라이트박스로 또는 루뻬로도 그 자리에서 확인할만한 정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서 막상 자세히 살펴본 그 필름은 수세액이 제대로 빠지지도 못한 채 - 기포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말라붙은 채 - 스크래치가 여기저기 눈에 띄게 밟힌 채 - 필름은 그저 현상액에 들어갔다가 버려지고, 그리고 주워서 수납한 것뿐이었다..
여기에 포스팅한 대부분의 사진들은 그나마라고 할만큼 포토샵의 도움을 받아 수정한 것이다.. 물론 거의 손을 안 댄 것도 있으며, 그래도 손상이 적은 것은 꽤나 도장툴의 도움을 많이 얻은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내가 흑포에 사진을 다시 맡기는 일 따위는 이젠 없을 것이다.
설령 일요일을 비롯한 휴무일에 하는 곳이 그곳밖에 없다해도 그 점은 바뀌지 않는다.
필름의 유실 유무도 혹은 필름의 길이와 벌크 상황도 그 어떤 것이 유저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일까?
내게 2500원은 단지 현상비일 뿐 현상이 무사히 나와서 안심하고자 지출하는 보험비용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진은 소중하다. 그것이 사진작가의 것이던 혹은 이제 막 카메라 잡은 초짜들의 사진이던 그 가치가 바뀌지는 않는다. 난 딱 그만큼의 기본적인 가치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 가치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 곳에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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